오늘 위에서 들려 드린 엔야의 노래 [어찌 찬양 안 할까](How Can I Keep From Singing)는 찬송가 403장을 떠 올리게 하는 노래입니다. 찬송가 403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1. 나 위(爲)하여 십자가(十字架)의 중(重)한 고통(苦痛) 받으사 대신(代身) 죽은 주(主)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恩惠)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永永) 죽을 죄(罪)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
2. 예수 안에 있는 우리 한량(限量)없이 즐겁고 주(主) 성령(聖靈)의 위로(慰勞)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天國) 음악(音樂) 소리 같은 은혜(恩惠)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
3. 이 세상(世上)의 모진 풍파(風波) 쉬지 않고 불어도 주(主)님 안에 보호(保護)받는 우리 마음 편(便)하다 늘 깨어서 기도(祈禱)하고 저 천국(天國)을 바라며 주(主)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 이 찬송의 가사를 지은 로우리( R. Lowry) 목사님은 미국 남북전쟁이 임박하여 술렁이던 1860년에 두렵기만 한 주변상황을 바라보기보다는 변치 않는 주님의 가호와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가사를 썼습니다. 역경 속에서 로우리 목사가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시편기자의 말씀 묵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그렇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도 찬양, 둘도 하나님 찬양입니다. 그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찬송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삼중적(三重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밝히듯이 첫 번 째는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입니다. 2절은 말씀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3절은 천국에의 소망(3절)입니다. 첫 번 째는 역사적으로 2천여 년 전에 일어난, 이미 체험한 과거적 사건이요, 두 번 째는 바로 여기서 말씀으로 양육 받는 현재적 사건이요, 세 번 째는 역사의 정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미래적 사건입니다.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기대 속에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주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속사역이 이 노래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루이스(C.S.Lewis)는 그의 저서 [시편 명상]이란 책에 기록하기를 “가장 겸손하고 동시에 가장 균형 있는 사람은 많이 찬송하는 반면, 괴짜나 부적합한 불평분자들은 가장 적게 찬송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불평분자들은 아예 찬송을 안하지요. 할줄도 모르고... 찬송은 반드시 노래를 부르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말이나 행위(악기, 춤, 몸짓 등)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주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했으니 찬송은 의무입니다. 시편을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4:1)고 노래하였지 “여호와여 내 영혼을 송축하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송축하고 경배하고 찬미하고 영광을 돌리도록 초청되었습니다. 이 말은 명령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찬송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쳐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 연합군이 탈환한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습니다.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 중 한 명이 한쪽 벽 후미진 곳에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니??? 그 연합군 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하나의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메마른 광야에서도, 넘실거리는 파도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찬양(讚揚) 안 할까.(장재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