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 9명의 지혜
1 - 주나라 태공망 ●강태공(姜太公),
운 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지 말라!
내가 수십년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 조강지처 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 서백을 만나
- 은나라 주왕(紂王) 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 결코 하늘을 원망하거나 포기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이었던 단 한번의 기회로도
-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2 - 한나라 회음후 ●한신(韓信),
용 모가 볼품없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라!
나는 어렸을때 보잘것 없는 외모때문에
- 불량배의 가랑지사이를 기어건너는 치욕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 범증의 천거를 번번히 거부하며
십년간이나 말단벼슬아치 집극랑자리를 맴돌게했다.
항우에게 실망하고 유방 밑으로 들어갔으나
- 연전연승하며 '해하'에서 항우를 완전히 섬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줄때까지 갖은 수모를 견뎌내야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없는 몰골뒤로 천하웅비의 뜻을 감추고
뭇사람들의 갖은 야유와 모욕을 참아내며 기어코
- 전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
3 - 사기의 작가 ●사마천(司馬遷),
한 때 자존심과 명예를 짖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 생(生)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벗 이릉장군을 변호하다 무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짤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의 수치를 못참고 자살하는 者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간다는
-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사기> 완성한
-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4 - 중국유일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여 자로 태어나서 하고픈 일을 못한다고 얼고만 있지 말라!
나는 아버지 무사확의 후처소생 둘째딸로 태어나
갓 14살때 최말단후궁 재인이 되어 당태종 이세민을
- 가무로써 섬겼다.
황궁생활초기 나의 경쟁자는 여자였으나
- 비구니로 물러앉았다가
태종의 아들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황궁으로 돌아와
-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생산하며
황후가 된 후 부터 나는 남자들과 힘겨운 전쟁을 시작했다.
장손 무기를 내쳤고 상관의를 처형하였으며
- 심지어 나의 4명의 아들마저 차례로 버렸다.
내 나이 67살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 철옹성을 만들고나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女帝 聖神皇帝가 되어
- 15년간 천하를 다스렸다!
5 -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
집 안배경이 나빠서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오랑캐의 나라 원대말기
- 안휘성의 빈농 한족집안에서 태어나 17살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서 가믐과 기근에 찌든 험악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전란통에 비적 무리의 일개 졸개가 되었을때
-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후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공으로 반란군의 2인자가 되어
원나라 몽골군을 중원에서 몰아낸 후에도
- 양반사대부집안의 멸시와 견제속에서 시달려야했다.
나는 송곳하나 꼿을 땅이 없었던 빈농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가 되었을때 조차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 결국 몽골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漢族) 천하를
- 회복한 명나라의 초대창업황제가 되었다.
6 -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나 이가 어리다고 어미의 치마폭 뒤에
- 숨어 칭얼거리지 말라!
나는 8살때 황제가 되었고 13살때 결혼을 했으며
- 14살때부터 스스로 친정(親政) 을 시작했다.
응석을 부릴 겨를도 없이 오삼계, 상가희,
- 경계무의 삼번난(三藩亂)을 제압하고
몽고를 평정했으며 티베트까지 원정했다.
나는 어린 나이의 어리광도 모른채
- 군주가 되어 61년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7 - 청대말 거상 ●호설암(胡雪巖),
돈 이 없어서 재기할 수 없다고 낙담하지 말라!
나는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학업도 못마치고
전장(錢庄)에 들어가 똥오줌을 치우고
- 마루를 닦으며 잔신부름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빈손으로 사업을 일으켰고
- 다시 빈털털이가 되는 과정을 겪고 또 겪었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빈손이라도
- 언제든지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한푼도 가진게 없는 가운데도 스스로의 재기를 믿었고
내게 없는 것을 메꾸어주는 인재를 대함에
-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큰 상인이 되는데 돈 보다는 사람이 더
-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던 나는 부와 명예를
- 모두 거머쥔 장사의 신 "상성(商聖)"이 되었다.-
8 - 저우언라이 ●周恩來(주은래),
만 년 2인자라고 보스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말라!
나는 1935년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을 모시고
- 만리장정을 따라 나선 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 41년동안 2인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공산당초기 탑리더의 코스를 밟던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모택동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추천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 호소력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때문이었다.
총리시절 행정보고를 함에 모주석의 침상옆에 꿇어 앉아야했고
방광암수술을 받고싶어도 (毛)의 허락이 떨어지지않아
- 수술을 2년간이나 미루어야했다.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속에서도 美日과의 수교,
문화대혁명의 폐허속에 놓인 국가경제 재건,
등소평을 재 신임하는 권력의 재편성을 위해 촌음을 다투었다.
나는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 죽어가는 나 따위는 돌보지말고
-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인민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1인자,
- 인민의 벗으로 다시 태어났다.
9 - 덩샤오핑 ●鄧小平(등소평) ,
잘 나가다 넘어지고 재기했다
- 다시 쓰러진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나는 문화대혁명때 반모주자파로 몰려
- 홍위병으로 부터 공개비판을 당했고,
잠시 일어났지만 하방당하여 강서성의 한 공장에서
- 4년간을 육체노동자로 버텨야했다.
주은래 총리의 도움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로
- 재기했다가 4인방의 농간에 또 다시 실각하고
- 가택연금까지 당해야했지만
모택동사후 정국수습용으로 재기용된 후
- 화국봉과의 5년 권력투쟁끝에 최고실권을 장악했다.
나는 세번 쓰러지고 네번 일어난 역전 !
용사로서 마지막 정치적 위기였던 천안문사태의
- 시련을 견뎌내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 오뚜기 부도웅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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