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공순이의 소원
가난이 흉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는 아픔과 상처를 많이 주고 떠났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부모님께 중학교 보내달라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한채
14살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책가방 대신에 도시락 가방을 들고
청계천 봉제 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아침부터 저넉 늦게까지 재봉틀을 돌리는
고달픔 보다는 더 고통스러은 것이 있었다.
아침에 버스를 타면 같은 내 나이또래 아이들은
다 교복을 입었는데
나만 사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서러운 것은
같은 또래의 남학생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또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공순이"라고 놀리는 것이다.
어느 아이들은 비웃는 얼굴로 또는 측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도 하였다.
평화시장,
그 시절에는 자동차의 매연과
시멘트 기둥 벽만 가득한 청계천 하늘을 올려다보며
"죽고싶다"고 해본 날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에 나가서 중고등부 예배에 참석했는데
학생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애는
달랑 나 하나뿐이었다.
감색 치마에 감색 저고리에
흰색 넓은 깃을 단 중학교 교복이
임금님 왕복과 왕관보다 더 입고 싶었다.
교회에서는 나를 깜싸주려고 애를 쓰는 아이들고 있었고
선생님들도
내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몇달은 다니다 나는 더이상 창피해서
교회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못 배운 그림자는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언제나 내 마음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에 더 열을 올렸고
자식들은 의사도 되었고
수의사도 되었다.
그렇게 세월을 다 보내고
공부의 꿈도, 교복의 꿈도 희미해질 50대 후반에
하나님은 내게도 기회를 주셔서
그립고도 부러웠던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성년 중학교를 거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10대 공순이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학교 교복 입은 학생들이 그렇게도 부러웠던 내가
이제는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었다.
얼마 전 어느 아마추어 시인의
"남동 공단에 일하러 가는 근로자"
라는 시에 눈길이 엄추어 섰다.
"공순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공단에 다니던 아픔을 다 잊은 줄 알았더니
아직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았었나보다.
-한기옥의 산문집 "그래도, 그래도" 중에서-
"환난은 인내를,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라"(로마서5: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