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기생 설매의 독설-조선왕조 야사(14)​

록원 2015. 11. 2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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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설매의 독설-조선왕조 야사(14)

 

 

고려를 쓰러뜨리고

조선이 새로이 탄생했으나 민심을 얻지는 못했다.

 

두문동에

문관 72명과 무관 48명이 산다는 소문이 퍼져,

백성들 사이에

고려에 대한 향수가 더욱 짙어 갔다.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는 사람들은

구관들의 새산을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해

역성 혁명을 일으켰다고는 하나,

백성들을 위하기는 커녕

자기들 잇속을 챙기는 것 외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개성의 백성들은

새 정부가 수도를 옮기기 위해

한양에 궁궐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삶의 터전마저 잃게 되어 절망하고 있었다.

 

개성에

남아 있자니 생계가 막막했고,

조정을 따라 한양으로 가자니

낯선 땅이 두렵기만 했다.

 

새조정에 협조했던 고려의 신하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이루어 놓은

개성의 가산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옮기는 일이 몹시 심란하기만 했다.

 

이처럼

개국공신 가운데

개성에 기반을 튼튼히 다져 놓은 신하들은

천도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새 조정은

민심이 따르지 않아 천도를 더욱 서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개국공신들이 기생집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배극렴,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특히

배극렴은 공민왕의 정비에게서

옥새를

빼앗다시피하여 이성계에게 바쳐

개국 일등공신에 책록된 공신으로

그때 정승이었다.

 

이때

배극렴의 눈에 드는 한 기생이 있었다.

몸매가 몹시 곱고 얼굴이 복스렀웠다.

악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배극렴은 기생에게 정성을 들였다.

 

"이름이 뭐더냐?"

"정승께오서 천한 것의 이름은

알아 무엇 하시겠나이까?"

그녀의

말 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으나

배극렴은 기생에게 빠져

그마저 어여쁘게 보았다.

 

천한 것이라니 당치 않구나.

너는

지금 개국공신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고 있느니라."

"그렇다고 천한 것이 개국공신이 되겠사옵니까?"

"이름을 말해 보아라."

"설매라 하옵니다."

"눈 속의 매화라...좋은 이름이로다."

"이름을 그럴 듯하오나

절개는

대감마님과 별로 다를 바 없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저 농으로 한 말이나이다."

"그것 참 맹랑하도다."

백극렴은

설매의 말이 너무도 귀엽게 느껴져

당장이라도 안고 싶을 지경이었다.

 

점점 더 주흥이 무르익어 갔다.

배극렴은

설매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매우

절제된 행동거지가

배극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술에 취했고 설매에게도 취했다.

"설매야,

너 오늘밤

나와 만리장성을 쌓아 보지 않으려느냐?"

 

"대감,

무너진 성은 쌓아서 무얼 하옵니까?"

설매의 대답이 쌀쌀맞았다.

 

"그러면

내가 맘에 들지 않다는 말이더냐?"

"천한 것이 마음에 들고 아니 드는

사내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내 너를 호강시켜 주고 싶구나!"

"으레 듣는 소리오니

못 들은 걸로 하겠사옵니다."

 

설매가

요리조리 빠져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배극렴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하찮은

기생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어서

심기가 매우 편치 않았다.

그는 억지라도 써서

개국공신의 체면을 살리고 싶었다.

 

 

"네 이년!

너는 동가식 서가숙하는 기생이 아니더냐!

오늘밤에 나의 수청을 들라!"


배극렴의 큰 소리에

좌중은 무슨 일인가 하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설매는 입가에 냉소를 띄고

배극렵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누구의 명령이라고

제가 거역하겠사옵니까?

수청을 들라면 기꺼이 들어야지요.

하지만

대감께서도

절개는 이 천한 것과 다를 바 없사옵니다."

 

"뭣이야?

네가 감히 나의 지조를 그리 말하다니,

몹시 무엄하구나!"

 

"대감,

어제는 왕씨에게

오늘은 이씨에게 몸을 의탁하는 대감님과

동가식 서가숙하는

이년의 처지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겠습니까?"

"저런 요망한 것이 있나?"

배극렴의

말꼬리가 갑자기 흐려졌다.

 

다른 개국공신들은

설매의 가시 돋친 말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었다.

거기 모인

고려의 유신들은 괴로워 신음이 나왔다.

 

배극렴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깊숙이 고개가 떨어졌다.

설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나

공신들은 설매를 외면한 채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다.

 

 

일개

기생의 말 한 마디가

고려를

무너뜨린 개국공신들에게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조선왕조 야사 발췌 윤색-

 

 

출처 : 정든 삶,정든 세월
글쓴이 : 地坪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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